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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 돌아오니 쌀이 떨어진다’라는 말처럼, 여행에는 다시 탄력이 붙었지만, 걷는 것은 예전 같지 않다. 무릎 관절을 생각해 먼 길을 종주하는 여행은 조심하고 있다. 대신 시군 단위를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며, 두어 시간 동안 10km 안팎을 걷는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이렇게 여행하다 보니 풍경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행정과 생활 방식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각 시군의 문화관광 정책과 대중교통 체계가 비교되고, 현장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의 행정 수준도 짐작하게 된다.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걷기 안내 체계는 울주군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다음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 덕분에 지도나 휴대전화에 의존하지 않고 주변 경치를 즐기며 길을 이어갈 수 있었다.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말이 실천되고 있는 지역이다.반면 어떤 지역은 버스 정류소에 시간표조차 없고, 어떤 곳은 전체 노선표만 있어 암호처럼 해독해야 한다. 고창군은 달랐다. 정류소마다 해당 지점에 도착하는 시간만 따로 표시해 두었고, 버스는 시간을 잘 지켰다. 이런 차이는 단순한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행정의 얼굴이기도 하다.버스 기사는 현장에서 일하는 관광 홍보대사다. 보성에서는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면 가장 가까운 곳에 내려주었다. 반면 어떤 시군에서는 20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더니, 저만치서 오는 버스를 향해 손을 들고 뛰어가는데도, 멈추지 않고 지나가 버렸다. 결국 하룻밤 일정을 취소하고 돌아와 버렸다.여행 방식이 바뀌면서 여행에 관한 생각도 달라졌다. 관광버스나 승용차로 이동하는 여행이 점과 점을 잇는 것이라면, 대중교통은 가느다란 선이고 걷기는 면에 가깝다.『지리학자의 인문 여행』을 읽으며 관광과 여행의 차이도 새삼 깨달았다. 관광이 ‘돌아옴’을 전제로 계획된 경험이라면, 여행은 고생과 변화를 감수하며 낯선 곳을 통과하는 과정이다. 관광이 예기치 않은 일을 줄이려 한다면, 여행은 그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넓힌다. 결국 관광이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길이라면, 여행은 자신을 바꾸는 길이다.또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 여행과 독서는 혼자일 때 더 깊어진다는 점이다. 20여 년 전에는 『시골의사』를 쓴 박경철 씨가 혼자서 그리스를 여행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혼자 걷는 시간이 더 편하다. 동행이 있으면 타협이 생기고, 그 타협은 때로 여행의 방향을 바꾼다. 오키나와에서 해양박물관 대신 골프를 선택했던 기억은, 여행에서 ‘나의 길’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지난해 말 『이병록의 신대동여지도』 1권을 내며, 오탈자를 찾아주면 제2권을 보내드리겠다고 했다. 친구 정진식이 기어코 오타를 찾아냈는데, 다행히 본문에는 없었고 봉투에 있었다.1권이 분량 제한이 있던 언론 기고문을 묶은 글이라면, 2권은 분량의 제약에서 벗어나 조금 더 숨을 길게 두고 쓴 글이다. 언론에는 요약문을 올리거나, 나눠서 올렸다. 그만큼 여행자의 숨결은 담겼지만, 한편으로는 사소한 일정과 내용까지 지나치게 많이 담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사진은 관광명승지 장면이 아니라, 길에서 발견한 상징적인 사진을 최소한 한두 장만 올린다.또 다른 고민이 발목을 잡는다. 선조들이 오가던 길 따라 마을 따라서가 아닌, 현대의 둘레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스스로의 물음이다. 기차와 자동차 길은 그들의 길이 아니지만, 현대인의 길도 길이다. 오늘의 교통을 외면한 채, 온전히 옛 자취만을 고집할 수도 없다.내용을 나누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태백과 평창은 남한강 발원지이면서 대관령과 태백산을 품은 고을이다. 구례와 남원은 지리산과 섬진강을 안은 고을이다. 태백의 탄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삼척은 관동팔경으로 분류된다. 책상 위에서 길과 마을을 나누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고민 끝에 이 책은 군사분계선, 관동경과 동해, 남한강, 섬진강, 역사와 문화라는 흐름으로 엮었다. 다음은 지리산과 한강, 영산강, 그리고 서해와 남해의 마을들로 이어질 것이다.나는 이제 단순히 걷는 사람을 넘어 글을 남기는 여행자가 되었고, 수많은 여행가와 역사 지리학자의 글 속에서 길을 배우고 있다. 이 책은 논문이 아닌 여행기이기에 각주로 밝히지는 못했지만, 도움을 준 책들은 마지막에 따로 적어 두었다.우리말을 사랑하는 나는, 외국어는 한문이나 한글로, 조상들이 쓰던 우리말로 바꿔 쓰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정류장은 터미널, 정류소는 정거장, 맞뚜레는 터널을 가리킨다. 우리 땅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 글을 아끼는 일은 결국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길을 걷는 일도, 글을 쓰는 일도 결국은 내가 사는 땅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